[손길신의 철길따라③] 대한제국의 경인철도이야기
하비엔
| 2020-07-27 16:14:52
[하비엔=하비엔 ]1897년10월12일 고종황제 즉위 후 1910년 8월29일 경술 국치일까지 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제국’이었으며 이 기간 중 경인철도 개통에 이어 경부·마산·경의 철도가 부설되었다.
지난이야기에 이어 경인철도이야기로 이어간다. J.R.Morse가 기공식이후 공사를 진행한 이야기가 별로 전해진 것이 없다. 그러나 착공 후 약 10개월이 지난 1898년 1월29일자 뉴욕에서 발행한 ‘Harper’s Weekly“지에 의하면 궤간은 1896년 7월15일 반포된 철도규칙의 표준궤간(1,435㎜)으로 총 25마일 중 10마일은 이미 레일을 깔아놓았으며, 증기기관차와 총 2,450피트의 한강철교용 8개의 철제 트러스 등 자재는 지금쯤 한국에 도착했을 것이라 하였고, 미국 Chattanooga사가 인천역과 서소문근처 역(경성역)을 건설 중에 있다고 하였다.
2,000여 원주민 노동자들은 은으로 지불되는 일당 35센트에 만족하며 성실하게 일한다 하였고, 주말 수압식철도로 현장을 둘러보는 사진을 게재하여 우리나라에 최초로 운영된 인차철도로 추정되며, BROOKS사 제작 Mogul-Tank형 증기기관차, 당시 사용된 미국 ILLINOIS STEEL사 제작 레일(등록문화재 424호로 철도박물관 전시 중) 등 모든 자재가 미국에서 직송되었다.
또한 경인철도 부설 특약 2조에 ‘교량은 보행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길 한쪽 또는 양쪽에 보도를 시설할 것“이라 명시되어 있으며 위 ‘Harper’s Weekly‘에도 교량 양측 넓이를 800피트(2,438㎜)라 하여 보도가 포함된 넓이로, 당시 Morse는 한강철교 부설공사로 양측 교대와 중간 교각 9개 중 3개를 건설 중이었지만 일제는 보도시설을 없애면서 양측 교대는 그대로 사용하고 건설 중인 중간 교각 3개는 조잡하다며 철거한 사유가 보도를 없애며 교각 규격이 맞지 않아서 인지, 실제 조잡해서인지는 알 길이 없다(1906년 압록강 철교는 양쪽에 보도설치). 다만 일본에 넘기기 전 재료준비나 공사 진척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었음은 확인된다.
그간 철도역사가 많이 왜곡되었다. 일예로 최근 철도역사 전문가를 자칭하는 사람까지도 경인철도 이전에 평양~진남포 간 진평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였다는 등 전혀 근거도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발표하는가 하면, 사실에 대한 연구도 없이 일제가 남긴 기록만을 인용하여 일제의 표현 그대로 “경인철도 부설권을 팔아 한몫 크게 챙긴 미국인사업가 모스”라는 글을 발표하는 등 철도역사의 왜곡이 지나쳐 사실은 어떤 것인가 밝혀본다.
조선총독부철도국 조선철도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창시시대 조선철도사’에 의하면 계약금 지불 후 Morse가 공사를 완료한 경인철도를 인계한다는 양도계약을 1898년 5월18일 체결 하고, 대한제국에는 1898년 말에야 통보하여 1899년 1월 9일 승인을 받았으며, Morse는 양도계약 체결 후 계속 공사를 진행하였으나 일제의 지나친 간섭으로 기한 내 준공을 못해주고 배상금만 물어주겠다는 위기감에서 1899년 1월30일 당시 사정가격 1,702,452원에 모든 것을 양도하고 결별한 사실에서 Morse가 부설권 매각으로 한몫을 챙겼다는 이야기는 역사를 너무 모르는 사람들의 무책임한 주장일 뿐임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철도박물관 근무할 당시 한국대학에서 방학기간 특강 차 방한할 때 마다 찾아주던 미국인 철도마니아 Whitworth대학의 Norman Thorpe교수에게 「왜 Morse는 경인철도 부설 도중에 경인철도를 매도하였는지?」 자료조사 요청을 한바, 다음 학기 강의를 위한 방한 시 그는 「당시 뉴욕에는 한국에 곧 전쟁이 터진다는 소문이 번지면서 투자자들이 투자를 철회함에 따른 자금난에 빠져서 어쩔 수 없이 도중에 양도계약을 체결하였지만 철도 부설공사를 완료하여 양도한다는 당시 조건은 Morse는 철도부설을 완공코자 하였지만 자금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증거다.」는 연구 결과와 이러한 내용이 포함된 당시 주한 Allen공사의 본국 보고서 사본을 제시하여, 결국 조작된 소문을 퍼트려 투자를 방해함에 따른 결과로 요즘 말하는 가짜뉴스가 그때도 위력을 발휘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 가개통을 5개월 앞둔 1899년 4월23일 경인철도 기공식을 다시 개최한 후 7월 한강 홍수로 공사 중인 철교자재가 떠내려가는 등 문제가 발생하자 7월27일 공사기간 6개월 연장을 요청하여 8월 5일 대한제국으로부터 1900년 9월28일까지 연장승인을 받았다.
홍수피해지를 피하여 남쪽에 노량진 임시역사를 만들고 1899년 9월18일 열차를 임시 노량진역까지 보내어 한강철교이남 인천~노량진 간 임시 가 개통식에 참석하는 한성부의 내빈들을 모시고 인천역에서 성대한 개통행사를 마친 후 인천~유현(杻峴)~우각동~부평~소사~오류동~노량진 간 하루 2왕복(1시간40분 소요)운행을 시작하였으며, 이때는 인천행을 서행열차, 노량진행을 동행열차라 불렀다.
1899년 9월16일자 독립신문에 게재된 당시 열차운행시각에 7개 역명 중 유독 유현(杻峴)역만 한자를 병기한 것은 당시에도 “뉴(杻)”를 ‘축’으로도 읽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둔 기사였다고 판단된다.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동인천역의 옛 이름을 ‘유현’아닌 ‘축현’으로 알고 있다. 12월에는 3왕복, 1900년 3월 4왕복, 7월 5왕복으로 열차의 운행회수가 증가되었으며, 1900년 7월 5일 한강철교가 준공됨에 따라 7월 8일부터 용산~남대문~경성 역까지 경인철도 전구간이 개통되었으며, 9월에는 옛 노량진 임시 역에 영등포역을 신설하여 영업이 시작되었고, 1901년 3월부터는 경성행을 상행열차, 인천행을 하행열차로 구분하였으며, 1903년11월부터 운행이 시작된 급행열차는 우각동·부평·오류동·노량진·용산역은 정차치 않고 통과하였다.
혹자는 경인철도 개통식이 거행된 1900년11월12일을 개통일로 보아야 된다는 주장을 하나 1905년 1월 1일 개통한 경부선 개통식을 5월25일 거행한 것과 같이 개통식은 기념행사를 거행한날 일 뿐이며, 실제 1899년 9월18일 가개통 후 열차는 계속 운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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