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길신의 철길 따라⑰] 유난히 파업이 잦았던 평원선(平元線) 부설공사
편집국
| 2020-11-02 18:18:58
▲평원선 [하비엔=편집국] 1907년 7월 8일 일본헌병대기밀보고서인 ‘헌기 제1384호’(통감부문서 6권)에 당시 경성일보에 ’새로 취임한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통감이 평원선을 부설할 의향이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에 인천 거류민들이 인천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며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시도하고 있으며, 평양~원산 간 평원선보다는 경성, 용산, 인천, 원산의 거류민들과 협력하여 경성~원산 간 경원선을 건설하도록 하겠다는 결의를 하였다는 보고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 예산문제로 계속 늦어지는 중 1926년 1월16일자 동아일보의 ‘금년 철도건설개량공사 예산 1,500만원 중 평원선 건설에 60만원이 배정되어 서포~사인장 간 공사를 착수한다’는 기사가 보도된 후 공사인부 부족으로 어려움을 격어 1926년 5월 6일에야 경의선 서포역에서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1926년11월27일자 신문에 예산사정으로 공사기간 3년을 연장하여 10년간 계속공사로 계획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1927년 6월16일 인부 350명이 임금문제로 파업에 돌입하자 공사 청부업자는 밀린 임금을 지급하여 18일부터 복귀가 시작되었지만 인부들의 동요가 주목된다는 신문보도에 원산상업회의소 평의원회는 평원선 속성공사를 총독에게 진정하는 등 문제가 계속되는 가운데도 1927년11월 1일 서포~사인장 간 25㎞가 개통되어 열차운행이 시작되었지만 다음날부터 공사인부 576명이 임금체불로 동맹파업을 시작하였고, 11월 6일에는 중국인노동자 35명이 임금을 자주 체불하는 일본인 청부업자를 폭행하고 경의선 사리원 방면으로 도주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노동인력 부족으로 토령터널공사와 덕지강 제방공사가 지연되는 가운데 1936년 11월 초에는 임금체불로 인부 575명이 총 파업을 시작하기도 하였지만 토령터널 공사 중 뜻밖에 천연 암굴이 발견됨에 따라 3년 계획이었던 공사를 2년만인 1937년 7월 개통하는 행운이 따르기도 하였다. | 장림~~양덕구간 27.4㎞가 1936년11월 1일 추가 개통되고, 반대편 구간인 고원~성내 간 30㎞가 1937년12월16일 개통되자 고원~성내 구간을 평원동부선으로 선로명칭을 변경하고, 이미 개통된 반대편 구간을 평원서부선으로 명칭을 구분(1937.11.27.관보 제3261호)하였다.
1941년 4월 1일 최종 구간인 양덕~성내 간 58.7㎞가 개통됨으로서 착공 15년 만에 서포역부터 용성~마람~배산점~사인장~봉학~자산~순천~봉하~은산~수양~신창~수덕~신성천~거흥~장림~동원~인평~지수~양덕~내동~석탕온천~거차~천을~운곡~관평~천성~성내~인흥~축전~미둔~부래산~경원선 고원까지 212.6㎞가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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